‘지금 처음과 나중처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시작은 같지만 처음 시작했던 시작과 다음에 다시 시작하게 되는 시작의 차이에서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나중을 나누는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입니다. 부활전의 일을 ‘지금 처음’이라고 한다면, 부활후의 일들은 ‘나중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분과 더불어 눈여겨 봐야할 표현이 두가지가 있는데 그 첫번째는 ’갈릴리’입니다. 처음 갈릴리에서는 베드로를 포함한 대다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택되어 부름을 받습니다. 즉 제자들로서의 처음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후 등장하는 갈릴리란 표현속에는 ’열 한제자가 갈릴리에 가서’라고 나옵니다. 가룟유다를 제외한 열한제자들인데 그들은 후에 진정한 사도들이 됩니다. 두번째 눈여겨 볼 표현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20절의 표현입니다. ’함께 있다’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1장에도 등장하는데 마태복음 1장 23절에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표현으로 재 등장합니다. 여기에도 큰 차이가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표현에는 왠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속엔 친밀감이 느껴집니다. ’나’ ’그’의 관계가 아닌 ’나’ ’너’의 관계로 좁혀집니다. 이런 차이가 ’처음 시작과 나중 시작’의 의미속에 담겨 있습니다. 처음 시작속엔 사람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시작은 실패로 끝납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의 경우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마19:27)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자신감과 노력들은 십자가 앞에서 부인과 도망침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후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어주고, 따라주는 신앙이 있는가하면 믿고, 따라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전자를 처음시작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나중시작입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나중시작입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님으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시작입니다. 이런 시작을 시작할 수 있길바랍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