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2일(월요일) 큐티: 마태복음 16:1~1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표적을 구한때는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도 이미 행하시고 난 다음이고, 그동안에도 수많은 병자들과 소경, 불구자들을 고치신때입니다. 표적의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칠만큼 많았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찾아와서 ‘표적보여달라’라고 하는 그들을 향해서 사도마태는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합니다.
믿기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위해서 혹은 시험에 빠트리려고 표적마저도 구하는 그들에겐 더 이상의 믿음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4절)라고 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마음속에는 믿음이 자리잡지 못합니다. 특히 ‘악함’이란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듯한 불신의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믿을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안믿으려고 항상 구실거리를 찾는듯한’그런 태도를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까요? 좋은면만, 은혜로운 면만을 보고 인정하려고하는 태도는 ‘착한’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 어떻게 하나보자, 저 사람 앞으로 어떻게 되나보자’ 혹은 교회를 향해서도 ‘저 교회 어떻게 되나보자, 저 목사 어떻게 되나보자’라는 식의 마음은 ‘악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란한’이란 의미도 항상 성적인 면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흉하고 난잡하기 짝이없는 마음을 음란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믿음의 측면에서는 양 극단에서 서로 대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똘똘뭉쳐서 ‘시험하는’그런 태도를 ‘음란한세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이런 음흉하고 난잡한 부분은 없는지 한번 살펴보길 바랍니다.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마음은 다른데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잘못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 솔깃해지는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구나 이웃이 잘되면 기쁘고 즐거워지는 마음보다 배가 살살 아파오는 그런 경우입니다.
요즈음은, 뉴스라고 하지만 사실 새로운 것, 신선한것보다는 ‘놀랍고 쇼킹한 것’에 더 집중되도록 만듭니다. 이런 세대에서 예수님 지적하신것처럼 ‘그들의 가르침, 교훈’인 누룩을 조심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신앙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