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5일(토요일) 큐티: 누가복음 19:1~10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할 수 없어’라는 표현을 두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일을 만났는데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 앞에선 어떻게 할 것이며, 사람 앞에선 어떻게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돈 앞에서는 ‘할 수 없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문제에 있어서는 좀 더 쉽게 ‘할 수 없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돈문제 보다는 사람문제에 더 쉽게 ‘할 수 없어’하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그만 두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라는 표현으로 묵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잘 안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은 ‘적극성’입니다. ‘어떠한 사람인가 보자’라고 시작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돌무화과 나무에 서슴지 않고 원숭이처럼 올라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죠. 게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 멀찍이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라’는 표현대로 예수님이 가실 길 한 가운데 서 있는 나무위로 올라갑니다. 이런 적극성이 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속해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한 명도 ‘예수님 제 집에 오셔서 유하세요!’라고 한 사람이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즉 구경꾼은 많았지만 ‘초대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구경하기만 원하고 있는건 아닌지요? 예수님을 초대해서 모실 수 있는 적극적인 신앙의 마음을 힘쓰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